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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와인이 들어오다

정말 향기롭다고 느꼈다.
더불어 입에서는 부드러우면서도 견고함을 유지하는, 그래서 좀 무겁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것이 내가 80년대 말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경험한 첫 와인에 대한 느낌이다.
80년대 중반 빈티지의 샤또네프 뒤 빠쁘(Chateauneuf du Pape)라는 남부 론 지역의 샤또 드 보까스뗄(Chateau de Beaucastel) 와인이었다.
프랑스 문학가 발자크를 연구하던 스위스 친구가 집에 놀러 오면서 들고 온 두 병 와인 중 하나였는데 좋은 친구들과 나중에 마시라고 내게 선물한 와인이었다.
그 때가지만 해도 필자는 와인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가끔 요리할 때 슈퍼에서 저가의 와인을 한 병 정도 구입해 분위기를 잡는 정도였으니까.
무엇보다 가난한 유학생에게 와인을 마시고 즐길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친구가 선물로 준 와인이 한 병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결국 일주일을 참지 못하고 와인을 오픈했고, 그 맛에 푹 빠져버렸다. 인생의 새로운 섬을 하나 발견하는 느낌이었다.
샤또 드 보까스뗄을 마시고 처음으로 이틀 끼니에 해당하는 돈을 주고 같은 와인을 한 병 더 사 마시는 최초의 행위를 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와인 탐구는 유학을 마치고 1991년부터 서울에서 에어 프랑스의 케이터링 매니저로 일을 하면서부터다.
직업적으로 와인과 음식에 대해 연구할 수 밖에 없었고 조금씩 더 다가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즈니스석에서 서비스하는 1990년산 샤또 까르보니유(Chateau Carbonnieux)를 맛보게 되면서 와인에 대한 궁금증이 폭발하게 되었다.
이 와인은 처음 내게 충격을 준 남부 론(Rhone) 지역 와인과는 다른 성향을 지닌 보르도 남쪽 페싹 레오냥 지역의 그랑크뤼 와인이다.
그렇게 잘 알려진 와인도 아니었는데 기존에 가졌던 와인에 대한 생각을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다. 우선 와인의 색은 진했다.
향기는 풍부했으며 농익은 과일 향이 많이 올라 왔었다. 입에서는 그 어느 순간도 맛보지 못한 복잡함,
그러면서 맛의 균형이 놀랍도록 잘 잡혀 있었는데 한마디로 입에 착 달라붙는 그런 와인이었다.
두 번째 경험을 통해 필자는 와인 여행을 결심했던 것 같다.
이런 와인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무엇 때문에 이런 맛과 향을 내는지 궁금증이 밀려 왔다.
인생의 궁극적인 가치와 목표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와인 여행지는 부르고뉴로 정했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와인 마을 본(Beaune)에 머물면서 주변 와이너리들을 방문했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우연히 포마(Pommard) 마을을 거닐다 샤또 드 포마(Chateau de Pommard)를 방문하게 되었다.
정문을 들어서자 할아버지 한 분이 약간의 돈을 받고 와인 셀러 투어를 하고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와인 지하 저장고를 방문했던 그 느낌은 아직도 생생해 잊을 수가 없다.
고요하고 어두운 공간, 우리가 걸어가는 양 옆으로 가득 놓여 있는 오크통, 그들은 숨쉬고 있었다.
엄청난 양의 와인이 숙성되고 있는 와인 병 저장고의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거미줄은 와인에 쌓인 시간의 두께를 말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투어가 끝나는 맨 마지막 방에서 샤또의 와인을 시음하도록 해줬다.
샤또 드 포마는 일반 AOC 포마에 속해 있지만 샤또 드 포마라고 표시하면 다른 포마 지역의 포도를 섞지 않고
샤또가 소유하고 있는 포도밭에서 나온 포도로만 양조해 그 맛이 깊고 더 개성 있다.
병 모양도 우아하면서 진실되어 보였고 그 속의 내용물도 내게는 독특한 맛이었다.
피노누와 품종 특유의 직선적으로 강한 이미지를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지하 시음 공간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와인에 접근하는 방법을 잘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듯이 소중하고 섬세하게 와인을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와인 셀러 투어는 와인 한 병이 만들어지기 위해 이런 어둠과 고요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고
그때까지 여행의 모토로 삼았던 문화와 그림들의 모든 중심을 와인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가치를 느끼게 해줬다.
한 마디로 머리 속에서 종이 울리고 있었다.

이 사건 이후 필자는 매년 6주 정도씩 프랑스 와인여행을 하게 되었다.
보르도에서 샹파뉴로 그리고 르와르와 론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며 프랑스 와인에 대해 현장에서 와인 메이커와 오너에게 직접 배우게 되었다.
여행 중 얻은 나의 경험은 글과 사진으로 남기게 되었고 여러 해 동안 이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나만의 와인 자료가 되었다.
그리고 이 자료들은 8년 정도가 지난 2000년 말 출간된 나의 첫 번째 와인 책, <김혁의 프랑스 와인 기행>을 남기게 해주었다.
첫 책을 기획하면서 나는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맛보았던 샤또네프 듀 파프 지역의 샤또 보카스텔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부르고뉴에서 기차를 타고 오랑즈에 머물면서 이른 아침 택시로 페랭씨가 오너인 이 와이너리를 방문했고 셀러를 둘러 보며 오너에게 내가 방문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페랭씨는 그때 고맙다며 자신의 와이너리가 나오는 두꺼운 프로방스 사진집을 내게 선물했다.

대부분의 와인 매니아들은 어느 순간 자신이 마신 와인을 잊지 못해 와인을 탐구하게 되는데 필자의 경우도 물론 시작은 같았지만
그 느낌을 통해 와인 여행을 하면서 와인 자체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
한편 생각해보면 오랜 전통을 갖고 있던 프랑스 와이너리의 오너들과 접하면서 그들이 바라보는 와인 철학에 동화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 준 모습이 내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렇게 쉽고 빠르게 빠지지는 못했을 것 같다.
한 가문의 이야기, 와인의 대를 잇기 위한 그들의 노력과 좋은 와인을 만들려는 선구자들의 노력,
그들은 한 성의 성주이기 이전에 진정한 농부의 이미지를 잘 간직하고 있었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내가 희망하는 미래의 어떤 모습을 보고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들을 만나 대화하는 동안 그들의 깊이 있는 순수함을 알 수 있었고 이것은 그들이 만든 와인에서도 동시에 확인할 수 있었다.
와인과 만든 사람의 일체감, 결국 와인은 인간의 모습을 닮았다는 것을 와인 여행을 통해 실감할 수 있었다.

이제 와인은 필자의 인생 동반자가 되었다.
물론 젊은 시절의 꿈은 아니지만 그 꿈이 갖고 있었던 욕망의 강도만큼의 매력을 와인에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에 와인이 삶 속 깊숙하게 들어 온 것은 아닐까?
나도 와인도 시간과 더불어 숙성되면서 모든 면에서 부드러워지고 또한 깊어지는 것 같다.
어차피 인간은 와인만큼 시간을 오랫동안 견딜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오래된 와인 한 병 속에 가두어 놓은 시간과 자연의 영속성을 통해 그 시절을 감지할 수 있는 기쁨이 있다.
이것이 요사이 내가 올드 빈티지들을 접하면서 얻는 즐거움이다. 아마도 젊은 시절 와인이 내게 들어온 이후 가장 깊은 즐거움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같이 늙어간다는 것, 인생을 동반한다는 것, 와인은 그렇게 내속에 자리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