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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일어나는 와인에 대한 생각들을 적어놓은 곳입니다.
포도주와 아버지
포도주와 아버지 2017-10-01

주발 뚜껑에 아버지께서 주신 그 달달한 맛

[중앙선데이] 입력 2017.10.01 02:31 | 55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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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이야기


오래된 포트 와인은 우리네 가정에서 만들던 포도주가 숙성되었을 때 맛과 비슷하다.

오래된 포트 와인은 우리네 가정에서 만들던 포도주가 숙성되었을 때 맛과 비슷하다.

한 아이가 포도주를 담은 소주병을 들고 언덕을 오르고 있다. 기다리는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 뛰어가다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손을 높이 쳐들었기에 병이 깨지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 비록 팔꿈치에는 커다란 상처가 훈장처럼 남았지만.  
 
어릴 적 추석 즈음 포도주 심부름을 딱 한 번 했던 기억이다. 아버지는 달콤한 옛날 포도주를 좋아하셨다. 포도주를 어떻게 지켰는지 설명해 드리자잘했다며 따뜻한 주발 뚜껑에 포도주를 조금 따라 주셨다. 얼마나 달고 맛있었던지 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맛이 생생하다. 당시 포도주는 기업에서 만들었지만 집에서 만든 것처럼 숙성되지 않은 포도향이 신선했고 알코올보다는 달콤함이 먼저 입안을 감돌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추석을 지내고 이틀 후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에 더 이상 아버지와의 포도주 추억은 가질 수 없었다
.  
 
필자는 20년이 넘게 전 세계 와인을 마셔보았지만 단 한 번도 어린 시절 주발 뚜껑으로 마신 포도주와 같은 맛을 느껴본 적이 없다. 대부분 와인들이 드라이하고, 설사 달콤하다 해도 양조 방식이 달라 숙성된 단맛이었기 때문이다
.  
그런데 10년 전쯤 한 지인이어머니가 담근 20년 된 포도주라며 맛을 보라고 가져다주셨다. 첫 향에서는 오래된 중국 술이나 시골 장독에서 날 법한 간장 향과 짚 향이 느껴졌다. 맛을 보니 향과는 완전히 다른, 캐러멜 같은 달콤함을 유지하면서 깊은 산미와 농축된 맛이었다. 지인은오랫동안 창고에 방치했던 것이라 상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맛을 보고 놀랐다며 어머니가 술 담그던 기억을 떠올렸다. 필자 또한아버지가 주신 포도주를 20년 이상 숙성시킨다면 이런 맛이 나지 않았을까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  
 
포도주를 이렇게 오랫동안 강건하게 지킬 수 있던 힘은 역시 포도당과 알코올일 것이다. 좋은 해의 포도에는 포도당이 풍부하고, 알코올로 전환하고 남은 당은 와인의 맛을 달콤한 상태로 유지해 준다. 여기에 균형 잡힌 타닌과 산도가 받쳐 주면 숙성력은 길어지게 마련이다. 지인의 어머니가 선택한 포도의 품질이 이런 조건을 잘 맞추었고, 전통적으로 설탕과 소주를 첨가했을 테니 버티는 힘이 강해졌을 것이다. 창고의 적정한 온도와 이동이 없던 환경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한다
.  
 
이 맛은 몇 년 전 포르투갈 와인 여행 중 오래된 포트(Port·와인에 순수 알코올을 첨가해 도수를 높여 숙성) 와인을 시음하며 다시 한번 떠올랐다. 양조장 가족이 몇 세대를 걸쳐 보관해 온 100년 이상 된 포트 와인을 잔에 따랐는데, 끈적한 점도가 일반 와인의 몇 배나 됐다. 마셨던 잔에서는 하루가 지나도 와인 잔향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캐러멜·초콜릿·조린 과일 등 세상의 모든 달콤한 것들을 잔에 옮겨 놓은 것 같았다. 지인이 가져다준 토종 포도주도 오크통 속에 숙성시키면 이런 맛에 가깝게 숙성되지 않을까
.  
 
보름달이 수백 번 뜨고 지면서 필자의 어린 시절 포도주는 이제 와인으로 변했지만, 기억만큼은 그 시절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보름달이 휘영청 밝아 오면 모든 것이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어느덧 아버지 나이가 되어 버린 지금, 올 추석에는 아버지가 좋아하던 달콤한 포도주를 마주하며 그 짧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다시 한번 추억해 봐야겠다
.  
 
김혁 와인·문화·여행 컨설팅 전문가

www.kimhyu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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