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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일어나는 와인에 대한 생각들을 적어놓은 곳입니다.
Chateau Figeac 1949
Chateau Figeac 1949 2017-08-06

중앙선데이 543호 2017.8.5


보르도 그랑 크뤼 만찬에 참석했을 때였다. 바로 옆 좌석에 나이 많으신 할아버지 한 분이 있었는데 지나가던 많은 샤또 오너들이 인사를 했었다. 그분은 바로 생테밀리옹의 전설로 알려진 띠에리 마농꾸(Thierry Manoncourt, 1917년 출생), 샤또 피작(Ch. Figeac)의 오너였다. 보르도엔 수많은 샤또 오너들이 있지만 그들 모두가 존경을 받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농꾸씨에 대한 이 지역 사람들의 존경심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임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보르도의 필자 지인들은 그가 젊었을 때 생테밀리옹 지역의 어느 와인을 눈 가리고 시음해도 샤또 이름과 빈티지를 정확히 맞췄다고 전했다.
샤또 피작은 1892년 마농꾸씨의 증조부인 앙리 드 슈브레몽(Henri de Chevremont)이 구입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마농꾸씨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독일군에게 붙잡힌 전쟁포로였었다. 종전 후 풀려 나와 1943년부터 피작의 양조장에 몸담게 되면서 체계적인 양조기술을 습득했고 그것을 전파했다. 또한 그는 생테밀리옹 지역이 메독 지역과 같은 와인 등급 설정이 필요하다고 판단, 적극적으로 위원회 일원으로 참석하며 지금의 생테밀리옹 등급체계를 완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생테밀리옹은 1855년 이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메독의 등급체계와 달리 매 10년마다 재심사를 거쳐 새롭게 등급을 정하는데 피작은 최고등급 B그룹에 등재 되었다. 피작보다 우위의 최고등급 A그룹은 샤또는 오존과 슈발 블랑뿐이었다(현재는 샤또 빠비와 안젤뤼스가 추가됨). 그러나 지금의 슈발블랑의 명성은 피작의 포도밭 일부를 구입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필자가 함께한 저녁 식사자리에서 마농꾸씨의 사촌이 포도밭 일부를 팔아야만 했던 그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적이 있다. 물론 그 당시엔 슈발 블랑이 지금처럼 그렇게 유명하게 될 것으로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필자는 마농꾸씨에 대한 기억을 몇 개 간직하고 있다. 한번은 보르도 시음 회에 참석했다가 피작에서 하루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날 다른 샤또에서 저녁약속이 있어 외출하고 밤 11시경 샤또로 돌아왔었다. 현관문을 열자 하얀 종이로 화살표 표시가 있어 따라가보니 거실 테이블 위에 그날 저녁 식사하면서 시음했던 와인을 필자를 위해 조금씩 남겨 놓은 것이 보였다. 마농꾸씨의 자상함에 감동했고 필자는 야밤에 혼자 거실에 앉아 피작의 4개 빈티지를 음미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었다. 또 한번은 피작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할 때였다. 마농꾸씨의 딸과 사위, 사촌들이 함께 참석했고 식사 코스마다 다른 빈티지가 선보였다. 마지막에 나온 와인은 이미 디켄터에 담겨있었기 때문에 몇 년 산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농꾸씨는 필자에게 그간 잘 배웠는지(?) 알아본다며 빈티지를 맞혀보라고 했다. 필자도 꽤 오랫동안 보르도를 드나들며 올드 빈티지들을 맛본 경험이 있어 색과 향 그리고 맛을 분석해 봤는데 색은 아주 오래되어 오랜지 빛을 띄었지만 입안에선 신선함이 가득했다. 오래된 빈티지인데 신선함이 있는 와인, 필자는 조심스럽게 60년대 정도라고 이야기했는데…… 마농꾸씨는 살짝 미소를 띄며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며 와인 병을 보여주셨다. 1949년 산이었다. 마농꾸씨는 1943년부터 병 입에 관여했고 47,48년을 거쳐 생애 4번째로 병 입한 귀한 와인이었다. 신선하게 느껴졌던 것은 타닌 성분이 다시 분해 되면서 신선한 맛을 제공한 것. 올드 빈티지의 정수를 느끼는 것 같았다.
마농꾸씨는 2010년 세상을 뜨기 전, 마지막으로 있었던 2006년 생테밀리옹 등급 심사에서 오존이나 슈발 블랑과 같은 등급을 샤또 피작이 받기를 기대했지만 결국 이루진 못했다. 하지만 와인 마니아들은 피작 와인의 숙성력이 얼마나 놀라운지 그가 남긴 50개 이상의 빈티지들을 통해 경험하고 있다. 와인에 전 인생을 걸었던 마농꾸씨, 그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와인들은 오늘도 누군가의 셀러에서, 누군가의 테이블 위에서 큰 기쁨을 주고 있지 않을까.


김혁 와인·문화·여행 컨설팅 전문가
www.kimhyu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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