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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일어나는 와인에 대한 생각들을 적어놓은 곳입니다.
무 항생제 유정란
무 항생제 유정란 2019-02-13


양양의 내곡리로 이사와 솔밭 산책길로 향하던 중 우연히 동네에서 계란을 파는 집을 발견했다. “무 항생제 유정란”이란 문구와 전화번호가 있어 메모해 두었었다. 오늘 통화를 해보니 할아버지 한분이 계란이 있단다. 10개를 주문하고 농장 앞에서 기다리니 왜소한 크기에 좀 마른 편인 할아버지가 멀리 떨어진 집에서 검은 봉 다리를 하나들고 나오신다. 제법 큰 누렁이 두 마리는 낮선 사람 방문에 연실 짖어대고.. 이윽고 할아버지는 내게 검은 봉 다리를 내미시면서 다른 한손에 꼭 쥐고 온 계란 하나를 덤이라며 봉지에 함께 넣어주셨다. 감기에 걸리셨는지 작은 기침을 연달아 하는 너머로 창백한 하얀 얼굴이 보였는데 수염이 듬성듬성 나있기는 했지만 맑아보였다.
계란 11개가든 봉지를 들고 돌아오면서 마치 이솝우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계란이 병아리를 낳고 병아리가 닭이 되어 이것을 팔아 돼지를 사는 꿈을 꾸는 아이, 우화에선 그만 계란이 깨져 버리고 더불어 모든 꿈도 사라지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들고와 우화처럼 되는 일은 없었다. 집에 와 봉지를 열어보니 생각보다 크기는 작았지만 아주 예쁜 계란들로 일반 란과 청란이 반반 들어 있었다. 나는 바로 삶아 시식을 해 봤는데 색이 선명하면서 노른자와 흰자 사이에 회색 경계가 보이지 않은 아주 신선함이 느껴졌고 부드러우면서도 탱탱한 식감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계란의 비릿한 향을 느낄 수 없어 더없이 좋았다.
내게 선명하게 남아있는 계란의 이미지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노르망디에서 유학시절 집근처에 일반 슈퍼보다 가격도 좋고 가끔 쌍알도 건질 수 있는 작은 가계가 있었다. 휴일에도 오픈하는 가계주인은 턱수염이 있는 아저씨였다. 내가 계란을 살 때면 “계란 몇 개주세요”란 말을 불어로 해야 하는데 초창기 불어가 서툴고 특히 계란 발음(oeuf:외프)이 어려워 아저씨를 만족시키는데 늘 실패했었다. 그러자 어느 날 부터 아저씨가 직접 나서 내 발음을 교정시켜주기 시작했고 얼마안가 계란 발음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그 가계에 들리면 더 이상 아저씨께 계란 몇 개주세요란 말이 필요 없이 자동으로 계란을 사올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말을 하나 사전에서 찾게 되었고 좀 더 세련(?)되게 아저씨에게 계란을 주문할 수 있었다. 가계에 들려 아저씨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꼼 다비뛰드(comme d’habitude : 언제나 처럼)하면 아저씨는 계란을 6개 담아주셨다.
두 번째 기억은 프랑스 와인기행을 쓰기위해 부르곤뉴 와이너리를 방문하고 파리로 돌아오는 기차간에서였다. 앞자리에 앉은 할머니는 내내 뜨개질을 하고 계셨는데 그 옆엔 보자기로 싼 물품이 놓여 있었다. 할머니와 대화를 트면서 파리엔 왜 가시느냐고 물었더니 딸 만나러 가신다고 했다. 그러면서 영감은 닭 돌보느라 같이 올 수 없었고 할머니만 오늘 아침에 낳은 달걀들을 싸들고 가는 중이라고 하셨다. “딸이 집에서 닭이 나은 계란을 좋아해요. 오늘 저녁에 이 달걀로 맛있는 오믈렛을 해 줄 거야”생각만해도 군침이 돌았다. 신선한 토종 란으로 만든 오믈렛, 맛있는 버섯이라도 썰어 좋은 버터와 올리브 오일로 오믈렛을 만든다면 정말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이야기하는 내내 맛있게 먹을 딸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이윽고 기차가 파리 리옹 역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 방송이 나왔다. ”이 열차는 리옹역에 작은 사고가 있어 정차하지 못하고 근처 역으로 변경 정차 하겠습니다“ 할머니는 ”그럼 내 딸은“하며 리옹역에 마중 나와 있을 딸을 걱정하며 당황했지만 그 와중에도 계란 꾸러미를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아마 내 생각에 딸과 할머니는 잘 만났고 낮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맛있는 오믈렛을 먹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와인도 한잔 했을 것이다. 무슨 와인이 어울릴까? 부르곤뉴에서 올라 가겼으니 당연히 부르곤뉴 와인으로 즐겼을 것 같은데 .... 나라면 부르곤뉴 스파클링, 크레멍을 오픈 했을 것 같다. 샤르도네의 상큼함이 낮에 있었던 예기치 못했던 긴장을 풀어 줄 수 있을 것 같으니.....

어쨌든 양양에서 또 하나의 먹거리를 발견해 기분이 좋다. 신선한 달걀 하나가 내 인생에서 이렇게 큰 기쁨을 준적이 없었던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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