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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일어나는 와인에 대한 생각들을 적어놓은 곳입니다.
예쁜 언니들을 위한 양양 만찬
예쁜 언니들을 위한 양양 만찬 2019-11-26





와인 덕분에 오랫동안 알고 지내고 있는 지인이 친구 두 명을 동반하고 양양을 찾았다. 그동안 온다고는 했지만 시간 내기가 힘들어 미루고 미루다 드디어 몇 주 전 방문 날짜를 알려주었다. 같이 동반하는 두 명에 대한 정보는 주지 않고 “예쁜 언니들” 이라고만 알렸다. 그리고 금요일 오후, 드디어 예쁜 언니들의 실체가 공개 되었다. 한명은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이고 다른 친구는 지인보다 한두 살 위의 언니였는데 둘 모두 와인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다. 이 세 명의 언니들은 몇 해 전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그랑 주르 드 부르곤뉴Grands Jours de Bourgogne) 라는 부르곤뉴 와인 시음투어를 함께한 사이였다.


서울 강남에서 출발한다고 알린 시간이 오후 2시, 하지만 4시 초반에 벌써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카트를 갖고 오라는 말에 현관으로 가보니 이미 차에서 여러 물품들을 내려놓고 있었다. 지인은 내가 이사 온 후 첫 방문이라 휴지 한 박스와 본인이 수입하는 와인 한 박스를 준비해 왔고 다른 두 언니들도 오늘 마실 와인과 치즈 바구니를 선물로 준비해왔다. 언니들은 짐을 내려놓자마자 바로 호텔로 떠났고 잠시 후 내가  픽업하기로 했다. 저녁에 와인을 마셔야하기 때문에 차를 호텔에 두기로 한 것. 서울에 있을 땐 지인들을 가끔 집으로 초대해 요리와 와인을 즐길 기회가 있었는데 양양으로 오니 식사를 초대하기엔 좀 먼 거리였다. 하지만 오늘은 세 명 예쁜(?) 언니들을 집으로 초대해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으니 며칠 전부터 메뉴와 동선을 생각해 놓았다. 우선 식사 전 아페리티프를 낙산 바닷가에서 하고 집으로 이동해 저녁을 먹을 계획이었다. 전식으로 꽃새우와 샐러드를, 본식은 두 가지를 준비했는데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은연어(바다에서 잡은 연어를 이곳에선 그렇게 부른다)와 돼지 갈비였다. 연어는 전날 양양 시장에서 한 마리를 구입해 통째로 손질해 두었다. 와인은 특별히 정해 두지 않고 그때 상황에 따라 셀라에서 꺼내 마시는 것으로.....


5시가 조금 넘어 언니들을 호텔에서 픽업해 한적한 낙산 해변으로 데려갔다. 지인은 감기 기운이 있어 바닷가에서 한잔 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는데 막상 해변에 도착하니 제일먼저 잔에 손이 갔다. 저녁 바닷바람이 좀 차가웠기 때문에 담요와 따뜻한 목도리를 준비해간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바다를 보며 해변에 있는 평상에 담요를 깔고 미리 준비해간 치즈와 살라미를 놓고 스파클링을 오픈했다. 버블 넘버 원 로제, 몇 년 전 샴페인 지역보다 150년 전부터 스파클링을 생산한 리무지역을 방문했다가 들렸던 와이너리 재품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샤르도네가 몇% 들어갔는지에 따라 맛 차이가 많이 나는 스파클링이다. 여기엔 70%의 샤르도네와 20%의 슈냉 블랑 그리고 분홍빛과 구조 감을 더하기위해 10%의 피노누아를 첨가했다. 스파클링은 역시 야외, 특히 바닷가에서 마시면 그 풍미가 배가 되는 것 같다. 와인의 온도가 최적이 아니더라도 해변의 모습과 출렁이는 파도가 모자란 상태를 메워주고도 남는 것 같았다. 언니들도 매우 만족했다. 우선 시작이 좋으니 오늘 저녁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만찬의 첫 코스, 꽃새우 샐러드와 함께한 와인은 지인이 수입하고 있는 쥐라 지역에서 샤르도네 100%로 만든 화이트 와인(Domaine Courbet Les Isles,2016)으로 만드는 사람의 스타일이 와인 속에 잘 배어 있었다. 새 오크를 20% 사용했다지만 오크 향이 과하지 않았고 산미 또한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대신 내부적으로 다른 맛들과 균형을 잘 이루었다. 좀 더 자연적인 맛에 가까이 가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인 요리는 와인과 지역 특성을 보여주기 위해 준비했다. 양양에서 특히 이곳 남대천은 10월이면 태평양에서 연어가 산란을 위해 올라온다. 그 길목 바다에서 잡은 연어를 구할 수 있고 그 맛이 아주 쫄깃하다. 일반 마트에서 구할 수 있는 외국산 연어들은 양식으로 길러 기름이 풍부하지만 탱탱하고 쫄깃한 맛은 덜한 편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양양 근해에서 잡히는 연어는 대양을 누비다 온 덕분에 기름기가 적고 살에 탄력이 있어 식감이 좋다. 나는 이것을 맛보여 주기위해 전날 장에서 싱싱한 암놈(암놈이 수놈보다 좀더 맛있다) 한 마리를 구입해 얼음에 재워 두었었다. 연어가 너무 커 오븐에 통으로 들어갈 수 없어 삼등분해 요리하고 소스는 능이버섯으로 구수한 맛을 더했다. 가니쉬로 시금치와 렌틸콩 삶은 것, 감자와 표고버섯 볶음을 함께 내 놓으니 그럴싸했다. 와인은 언니들이 가져온 투르소(Trousseau) 품종으로 만든 쥐라 지역의 아르부아 2014년과 내 셀라에 있던 몽텔리에(Monthelie 1er Cru 2015)를 오픈했다. 아르부아 와인은 지인 친구가 마지막 남은 병을 구입해 두었다가 양양까지 가져온 것이었다. 많이 알려진 품종으로 만든 와인에 익숙한 사람들이 새로운 맛을 원할 때 마셔보면 좋을 와인이었다. 사실 투르소로 만든 모든 와인이 입맛에 맞는 것은 아닌데 <아르부아의 교황>이라 칭송받는 자끄퓨프네(Jacque Puffeney)가 2014년 은퇴하며 마지막 만든 와인이라는 점에서 더 의미가 있었다. 위대한 양조 가는 어떤 어려운 빈티지에도 그 특성을 잘 살려내기 때문에 와인을 통해 환경을 유추하고 이해할 수 있다. 거장의 와인 속에 깊은 향기와 균형의 미학이 잘 스며있다. 투르소라는 품종으로 이런 와인을 만들 수 있다면 아르부아 사람들이 그를 떠 받들만하다고 생각했다. 와인에는 잔잔하면서 실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몽텔리에 2015년은 처음에 좀 닫혀 있었는데 떠들고 마시면서 어느 순간 잔에서 향과 맛이 적당하게 올라 왔다. 산미도 있었지만 과일 맛이 좀 더 압도적인 느낌이었다. 나는 두 번째 메인으로 준비한 뼈가 달려 있는 돼지고기를 육즙이 잘 살아있도록 구워 몇 조각씩 접시에 올려 주었다. 가니쉬는 남아있는 것으로 함께하며 와인을 좀 더 즐길 생각이었다.


언니들 모두 와인을 좋아 해 새로운 와인을 오픈하게 되었는데 이제까지와는 다른 신선한 맛을 주기위해 내추럴 와인 한 병을 셀라에서 꺼냈다. 일전에 한번 마셔봤었는데 거부감(내추럴 와인은 향이나 맛이 독특한 경우가 있다)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오픈했다. 프랑스 남서부 루씨옹 지역에서 까리냥 100%로 만든 샤리바리(Charivari) 2017년산 내추럴 와인으로 올드 바인에서 느낄 수 있는 부드러움과 깊은 맛이 내추럴 방식으로 잘 살아난 와인이다. 색은 엷지만 산미가 좋고 방금 딴 과일의 신선한 맛을 병속에 그대로 가둬둔 느낌이 들었다. 이미 여러 와인들을 마셨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깨끗함을 선사한 와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우리는 이 와인을 모두 마셨고 한두 잔이 모자란 느낌이 있어 2015년산 지공다스 와인을 반병정도 더 마시고 언니들이 가져온 호두 타르트 케이크와 향이 좋은 중국 백차로 마무리했다. 5시경 해변에서 시작한 저녁이 11시가 되어 끝이 났다. 조금 긴 시간이었지만 즐거움 덕분에 시간을 잊고 있었다. 와인을 평소보다 좀 더 많이 마신 언니들의 안전한 귀가를 위해 택시를 불러 처음 시작했던 해변까지 동승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호텔까지 몇 백 미터의 밤 해변을 걸으며 서울에선 느낄 수 없는 시원한 배경의 밤바다를 거닐게 했다. 술도 깨고 산책을 겸한 약간의 운동으로 숙면 할 수 있도록....


언젠가부터 우리는 잠시나마 일상으로부터 일탈을 동경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낯선 동네에서 새로운 것들과 조우하면서 의식하기를 거부했지만 내부 속에 잠자고 있던 살아있는 자신의 또 다른 존재를 꺼내 펼쳐보며 삶을 환기시키게 되는 것. 바닷가에서 와인을 마시며 밤을 맞이하고 낮선 공간에서 편한 식사를 즐기고 파도소리만 들리는 적막한 해변에서 어둠을 여는 가로등불을 벗 삼아 걷는 일. 모두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쉽게 이것을 위해 떠날 수는 없는 것 같다. 아이들 때문에, 부모님 때문에 아니면 또 다른 말 못할 사정 때문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예쁜 언니들이 언젠가 피곤함으로 지칠 때 이 순간을 기억하며 추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에너지로 또 다른 일탈을 꿈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일 아침엔 내가 직접 내린 따뜻한 커피를 준비해 언니들에게 향기를 전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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