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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일어나는 와인에 대한 생각들을 적어놓은 곳입니다.
포도나무의 미학 그리고 인간
포도나무의 미학 그리고 인간 2019-12-18





며칠 전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분을 강원도 홍천에서 뵙게 되었다. 스스로를 산림 경영인이라 소개하며 자신이 맘에 드는 산을 구입해 1년생 식물에서 30년 이상의 목재용 나무까지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산 전체를 경영하시는 분이었다. 이 분은 단지 경영에서 끝나지 않고 나중에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헌정할 생각까지 갖고 계셨다. 이유는 더 명확했다. 자신이 국가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독일에서 유학했었는데 그 혜택을 다시 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자식들에게는 공부시켜 준 것으로 자신이 할 일을 다 하셨다고 생각했고 남은 여생을 산과 더불어 자연 속에서 살아가며 보내고 싶다고 했다. 더불어 지금은 봉고차를 캠핑카로 개조하는 일이 끝나면 1~2년 동안 시베리아 횡단과 유럽을 여행할 꿈을 갖고 있었다. 나보다 단지 4년 연배인 이분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늘 나무를 심고 그들과 더불어 자연 속에서 늙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지금까지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지금 나무를 심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까지 들었는데.... 꿈을 실천하고 있는 이분을 만나니 자신이 왠지 왜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느낌과 더불어 내가 느낀 나무, 특히 포도나무에 대한 생각과 기억들이 떠올랐다.


내가 처음 포도나무를 접한 시절은 70년대, 지금은 고인이 되신 형님과 함께 달콤한 포도를 서리하기 위해 포도밭 주변을 배회하면서다. 그때는 포도나무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나무가 탐스럽게 품고 있는 검은 포도 알만이 내게 다가 왔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러 여러 나라의 포도밭을 여행하면서 조금씩 포도나무, 그 자체의 아름다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얇거나 굵은 또는 젊거나 나이든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인간과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세월을 보낸 나무에는 유연함과 부드러움이 더욱 느껴졌다.

 

포도나무는 한번 심으면 3년을 기다려야 첫 수확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어린 상태이기 때문에 좋은 와인을 만드는데 사용하지는 못한다. 12년 정도가 되면 중급 정도의 와인을 만드는데 기여 할 수 있고 20년 이상 지나면 최고급 와인을 만드는 포도를 생산할 수 있다. 그리고 40~50년까지 최고 우수한 품질의 포도를 생산한다. 인간과 비교하면 청년에서 중 장년까지 비교할 수 있겠다. 그러나 포도나무가 단지 오래 되었다고 좋은 품질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자라난 환경이 아주 중요한데 이 또한 인간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 아주 척박한 환경이지만 스스로 살아남으려는 의지가 강한 나무는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는다. 이 세상에 자손을 남겨 대를 이어가려는 자연적 의지라고 볼 수 있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돌밭 환경에서 자신의 몸을 최대한 낮추고 바닥을 기어가듯 구불거리며 생존해있는 포도나무, 여기에 달려있는 한 두 송이 열매를 보면 경외감을 넘어 극도의 미학적 감성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고난을 극복한 삶을 겪었다 하더라도 영원할 수는 없다. 포도나무의 나이가 50년이 넘으면 서서히 생을 마감할 준비를 해야 한다. 열매를 제공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포도의 품질 면에서는 젊은 포도나무에 비해 보다 풍부하고 복잡하며 균형이 잡혀 있는 맛과 향을 제공해주지만 와인 생산자들이 원하는 생산량을 충족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에 외면당하게 된다. 결국 이들의 뿌리는 뽑히고 그 곳에 새로운 세대가 심어지게 된다. 하지만 모든 포도나무가 이 나이에 이르러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80, 100년 이상 존재하며 여전히 포도를 생산하는 나무도 있다. 여기서 생산된 포도들은 젊은 포도들과 함께 섞어 균형을 맞추던가 아니면 오래된 포도 자체만으로 귀한 와인을 만들어 특정인들의 고급 입맛을 만족시키기도 한다.

 

그럼 백 년이 넘은 포도나무의 모습은 어떨까? 100세가 넘은 인간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다. 거칠고 뒤틀어진 포도나무의 표면은 마치 깊이 파인 인간의 주름살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세월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모습은 인간이나 자연 속에 던져진 포도나무나 다를 것이 없다. 이들의 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시간은 동트는 새벽과 해지는 초저녁이다. 햇볕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아침, 나무들이 널려있는 포도밭을 거닐다 보면 그들 한 그루 한 그루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어떤 것은 이끼로 반 이상을 감싸고 있고 어떤 것은 다양한 방향으로 몸을 비틀며 자라난 것도 있다. 분명한 것은 같은 모양을 가진 포도나무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각도에서 바라봐도 같은 모양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무진 세월 동안 풍파를 격어 낸 모습이 풍겨난다. 거칠게 꿈틀거리며 주름진 세월, 무엇이든 시간의 흔적을 남긴 살아 있는 것에는 경외감을 느낄 수 있다. 포도나무의 생명력은 한 송이의 포도를 잉태하기 위한 거대한 노력이다. 비록 자연이 이들에게 늘 충분한 햇볕과 목마름을 해소할 충분한 물을 공급하지 않는다 해도.... 그래서 이들의 살아 온 모습 앞에서 숙연해지는 것 같다. 세월이 담긴 숭고한 인간의 모습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나는 오랫동안 와인 여행을 하면서 지독히도 아름다운 포도나무들과 조우한 기억이 있다. 황량함속에 굳건히 견디고 있는 스페인 라만차 지역의 포도나무들이 그랬고 700미터 정상에 모여 있는 마치 분재와도 같은 포도나무들의 모습이 그랬다. 그러나 이들보다 좀 더 처절한 아름다움을 보여준 포도나무는 지중해를 바라보는 산 중턱에 놓여 있는 것들이었다. 바위산에 듬성듬성 심은 나무들은 뿌리를 내리기 위해 바위를 뚫고 안착해야만 했다. 강한 바위도 이들의 생명력 앞에서는 부서지고 가루가 되어 기꺼이 양분이 되었다. 이들은 이렇게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지중해를 바라보며 반짝이는 검은 포도 눈동자들을 품고 있었다. 이런 강인함 때문에 포도나무는 6000년 이상 인간에게 사랑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포도나무의 일생은 인간의 일생보다 더 길고 더 거칠 수 있다. 이들이 내어준 포도에는 나무가 자연 속에서 겪은 모든 기억들을 자신의 몸속에 간직하고 있다. 때문에 이것으로 만든 와인은 포도나무가 갖고 있는 모든 기억의 산물이다. 아이가 부모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듯 한잔의 와인을 마시며 우리는 나무의 기억을 더듬을 수 있다. 언젠가 우리가 한 그루의 포도나무와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다면 그 속에 우리의 영혼도 함께 내재해 있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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