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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일어나는 와인에 대한 생각들을 적어놓은 곳입니다.
외로운 영혼들과 마신 와인, 그리고 선명한 기억
외로운 영혼들과 마신 와인, 그리고 선명한 기억 2019-12-30





지난주 몇 일간 서울에 있었다. 생일과 크리스마스 그리고 년 말의 분위기를 한적한 양양보다는 북적거리는 서울의 한 복판에서 보내고 싶었다. 사람들이 그리운 시기니.... 생일날은 얼마 전 북유럽 여행을 다녀온 지인이 저녁을 초대해 강남의 한 고기 집에서 만났다. 둘만 보는 것이 안타까워(?) 여성지인 두 명을 초대했는데 그것마저도 한명이 사정이 생겨 오지 못하고 결국 세 명이서 만찬을 즐겼다. 생일도 생일이지만 한해를 마무리하는 의미도 있어 좋아하는 샴페인 한 병을 준비했고 지인도 의미 있는 레드 와인 두 병을 구입했다. 초대 받은 또 다른 지인도 레드 와인을 한 병 들고 등장했다. 우리는 조였던 허리띠를 느슨하게 풀고 잘 달아오른 숯불위에 먹음직스러운 고기를 올리며 샴페인으로 서로를 축하했다.  


샴페인은 마크 에브라 프리미에 크뤼 셀렉션(Marc Hebrat, 1er Cru, Selection). 샴페인 잔이 없어 일반 잔에 마셨는데 차라리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크 에브라 셀렉션은 강하면서 자신의 개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마치 포도 속에 있는 미네랄 하나하나를 아낌없이 뽑아내 병속에 옮겨 놓은 듯했고 이들이 어우러져 힘차면서도 섬세한 향과 입감을 보여주었다. 지인들도 오랜만에 입맛에 맞는 샴페인을 마신다며 즐거워했다. 심지어 약간 양념한 고기와 먹는데도 샴페인의 맛이 계속 살아서 입안에 돌고 있었다.

 
두 번째 와인으로 이맘때쯤이면 늘 회자되는 빈 드 앙팡 제주(VIGNE DE L’ENFANT JEJUS, Bouchard Per & Fils, 2106), 간단하게 <아기 예수의 포도밭> 와인으로 부르곤뉴 본 그레브 지역의 최고급 와인이다. 이 와인을 생산하는 본(Beaune) 마을은 부르곤뉴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 수많은 부르봉 귀족들의 중심 무대였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619년 이 마을에 카르멜라 수도회가 자리를 잡게 되고 같은 해 마게리트 파리고(Marguerite Parigot)라는 여자아이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12살이 되던 해에 수도원에 들어갔다. 아이는 성장하며 신과 직접적인 교감을 이루고 역사적인 예언을 1637년 12월 하게 된다. 바로 불임으로 알려졌던 루이 13세의 부인 엔 도트리슈 여왕이 왕자를 갖게 될 거란 것. 그런데 놀랍게도 이 같은 예언은 1638년 9월 5일 실제 사건으로 일어났다. 태양의 왕으로 불리는 미래의 루이 14세가 이날 태어난 것이었다. 이 같은 소문은 곧 왕가에 크게 알려졌고 다음해 아기예수에게 받치는 기도원이 수도회 포도밭에 지어지고 그 곳에 공식적으로 성스러운 아기 예수의 나무 조각상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 장소가 지금의 본 그레브(Beaune Greve) 포도밭 지역이었는데 수도회에서 이 사건 이 후 <아기 예수의 포도밭>으로 개명했다. 아마도 예언이 있은 후 이 포도밭에서 만든 와인을 엔 도트리슈 여왕에게 보냈고 그녀가 성스럽게 만든 와인을 통해 불임으로부터 해방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이 포도밭은 1791년 구입 당시부터 100% 피노 누아가 자라는 자갈이 풍부하고 경사가 급해 일조량이 많으며 포도나무의 뿌리가 깊이 내려 다양한 층의 영양분을 섭취한다. 그래서 이 포도로 만든 아기 예수 와인은 농밀하면서 향이 깊고 높은 단계에서 균형이 잘 이루어진 세련미를 보여준다. 내가 마셔본 기억으로 와인은 30년이 지나도 맛이 꺾이질 않았다. 그러나 오늘 오픈한 2016 빈티지는 영해서인지 와인 맛이 너무 올라오지 않았다. 때문에 병을 오픈한 채 잠시 기다려보기로 했다. 대신 이탈리아 와인을 먼저 마시기로 했다.

2009년 피에몬테 와인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와이너리에서 만든 것이다. 바르베라 달바(Barbera D’Alba, Superiore, codamonte, 2009, Mascarello Giuseppe e Figlio).  좀 길게 썼지만 마스카렐로 와이너리에서 만든 2009년산 와인으로 알바 지역의 바르베라 품종으로 만든 와인이다. 처음 오픈 했을 때 약간 닫혀 있었지만 향은 잘 숙성되어 있었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마스카렐로 와인에게서 느낄 수 있는 직선적인 드라이함과 섬세함이 잔잔하게 피어났다. 이 와인은 잔잔한 호수가 보이는 조용한 별장 벽난로 앞에서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조금씩 음미하면 좋을 와인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그 모습을 상상하며 즐길 수밖에 없었다. 달바 와인이 바닥을 드러내자 아기 예수 와인으로 잔을 채웠다. 30분 정도 지났기 때문에 맛이 좀 올라오긴 했지만 이전에 즐겼던 맛과는 차이가 많이 있었다. 역시 좋은 와인은 충분히 숙성시켜 마시는 것이 중요하단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우게 되었다. 사실 피노는 좀 일찍 마셔도 충분히 매력이 있는데 그 젊은 시절의 매력을 살짝 비껴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한 불빛이 거리를 메우는 이맘때쯤이면 내게는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교회재단에서 운영하는 초등학교를 다닌 덕분에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장병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가곤 했었다. 그 당시 내 목소리(지금은 많이 변했지만)가 맑고 높아 선생님이  무대에서 찬송가를 독창으로 부르게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난한 형편 때문에 이브라고 좋은 옷을 입지는 못했고 어머니가 손수 떠주신 겉옷을 입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무대용으로 좀 초라하다고 생각했던지 새 잠바를 입고 온 아이 것과 바꿔 입고 무대로 올라가게 했다. 찬송가 4절(그 맑고 환한 밤중에...)까지 독창을 하고 내려와 바로 내 옷으로 갈아입었는데..... 목소리에 감동한(?) 한 군인이 따라와 옷을 보고 그 아이에게 다가가 칭찬하려다가 얼굴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당황했다. 순간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과 내가 마주치자 얼굴을 알아보고 다가와 노래 잘 들었다고 무척 칭찬해준 적이 있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는데 어린 마음에 좀 속상했었다. 그날 밤 눈이 발목까지 쌓인 길을 걸어와 집에 계신 어머니에게 옷 투정을 잠깐 한 것이 기억난다. 그때 어머니 마음은 어땠을지....지금의 내 나이보다 10년은 더 젊은 시절이셨는데.....하지만 그날 일을 크게 마음에 두진 않았었다. 왜냐하면 상품으로 받은 우유가 많이 들어간 정사각형 미군용 건빵 맛이 그 초라함을 잊게 만들었고 어머니와 함께 오순도순 먹었던 기억이 훨씬 좋았었으니까...... 


세월이 흐르면서 어떤 것은 흐려지거나 잊히는 것도 많이 있지만 더 또렷해지는 것도 있다. 매년 이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그날 밤 눈길을 걸어오며 보았던 푸른 달빛과 나를 기다리고 있던 따뜻한 어머니의 모습, 그리고 처음 경험했던 신기한 우유 건빵의 맛이 모두 어우러져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초라했지만 그리운 기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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